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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역사 5] 춘추시대(春秋時代)-혼란의 시대 춘추오패(春秋五覇)의 등장, 철제 농기구의 출현, 사자성어 풍년시기

by 막장life 2023. 12.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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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역사-혼란의 시대 춘추오패(春秋五覇)의 등장

 

춘추시대 지도

 

 

춘추시대(春秋時代)는 주나라가 동쪽으로 도읍을 옮긴 기원전 770년부터 기원전 403년까지 370년간이다. 주나라가 동쪽으로 옮기면서('주나라의 동천'), 이미 왕으로서의 지배력을 잃었고 사실상 일개의 소국에 지나지 않았다.

그 대신 제후들이 서로 세력을 다투게 되었다. 이 시대에 주나라 왕을 대신하여 실질적으로 중국을 통치한 제후들을 패자(覇者)라고 하였으며, 춘추시대 370년간 5명의 패자가 있었다. 따라서 춘추시대를 춘추5패(覇)의 시대라고도 한다.

춘추시대에는 왕이 비록 소국으로 전락하여 힘이 없었으나, 명목상으로 천하의 주인인 주나라 왕의 명을 받아 다른 제후들을 거느리고 오랑캐를 무찌르는 형식을 취하였다. 이를 존왕양이(尊王攘吏) 라고 한다. 그러나 춘추시대 후반으로 가면서 왕으로 칭하는 제후들이 생겨서 5패의 명칭도 변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5패에 관하여는 사가들 간에 여러 설이 있으나, 제나라 환공(齊桓公), 진나라 문공(晉文公), 초나라 장왕(楚莊王), 오왕 합려(吳闔閭), 월왕 구천(越句踐)이라고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춘추오패(春秋五覇)

1) 제환공(齊桓公)

    제()는 전설로는 주(周)를 도와 은(殷)을 멸망시키는 데 공을 세운 태공망 여상(呂尙)이 문왕(文王)으로부터 산동성 임치(臨淄)에 영지를 받아 세운 나라로, 기원전 7세기에 환공이 왕이 되자 부강하게 되었다. 환공은 이복형 규(糾)와 싸워 즉위하고 재상으로 관중(管仲)을 등용했다. 관중의 헌책에 의해 어업·제염업·양잠업 등의 경제 정책을 장려하고 군대를 정비하여 기원전 679년 제후(諸侯)와 견(甄)에서 회맹하여 춘추시대 최초의 패자가 되었다. 기원전 651년 규구(葵丘)의 회에서 패업을 자랑했지만, 관중 사후에 3총(三寵)에게 권력을 빼앗기고 사후 내란에 의해 두 달 동안이나 시체를 매장하지 못했다고 한다.

 

***사자성어 : 관포지교(管鮑之交)

뜻 : 관중(管仲)과 포숙(鮑叔) 의 사귐이라는 뜻으로, 친구 사이의 깊은 우정을 말한다.

 

-> 내가 예전에 곤궁할 때 포숙(鮑叔)과 함께 장사를 한 적이 있었는데, 이익을 나눌 때 내가 더 많이 차지하곤 했다. 그럼에도 포숙이 나를 탐욕스럽다고 여기지 않은 것은 내가 가난한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전에 내가 포숙을 대신해서 어떤 일을 벌이다가 실패해 그를 더욱 곤궁하게 했건만, 포숙이 나를 어리석다고 여기지 않은 것은 시운이 좋을 때와 나쁠 때가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또 내가 일찍이 세 번이나 벼슬길에 나섰다가 세 번 모두 군주에게 내쫓기고 말았으나, 포숙이 나를 못났다고 여기지 않은 것은 내가 아직 때를 만나지 못한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세 번 싸움에 나가 세 번 모두 도망쳤을 때에도 포숙이 나를 겁쟁이라고 여기지 않은 것은 나에게 노모가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공자 규가 왕위를 놓고 다투다가 패하자, 소홀(召忽)은 죽고 나는 붙잡혀 굴욕을 당했을 때에도 포숙이 나를 수치도 모르는 자라고 여기지 않은 것은 내가 사소한 일에는 수치를 느끼지 않으나 천하에 공명을 날리지 못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나를 낳아준 것은 부모이지만 나를 알아주는 것은 포숙이다.

관포지교(관중과 포숙의 이야기)

 

 

 

 

2) 진문공(晉文公)

    춘추시대(春秋時代)의 진(晋) 나라의 제24대 공(公). 문공은 아버지 헌공(獻公)에게 추방당하여 19년 동안 열국을 유랑하다가 의형(義兄)인 진(秦) 나라 목공(穆公)에 의하여 62세에 고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진나라의 공이 되자 많은 현신(賢臣)을 얻어 먼저 주(周) 나라의 양왕(襄王)을 도와 그 자리를 다시 차지하도록 하였고 잇달아 송의 청으로 인하여 초나라의 군세를 격파시켰다. 제 환공(桓公)과 아울러 제후의 패자(覇者)가 되었으나 패자에 오른 지 3년 만에 죽었다. 

 

 

 

3) 초장왕(楚莊王)

    출생연도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기원전 614년 부친인 초 목왕이 급사하여 아주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고 기록되어 있다. 선왕 때부터 불안정한 왕권과 각지에서 일어난 반란, 어린 나이 때문에 그의 재위는 매우 불안정하였다. 거기에 재위 초반에 일어난 홍수, 냉해로 인한 기근까지 발생하여 민심이 흉흉해졌으며, 이를 진정시키려 측근 반숭과 영윤(재상) 자공이 동정을 나간 사이 약오(초나라 제14대 군주) 씨족(대대로 재상을 배출해온 유력 귀족 가문이었다)인 투극이 반란을 일으켜 공자 섭을 내세우고 수도를 장악한 다음, 장왕을 납치하여 자신의 근거지인 상밀로 향했다. 그러나 여 땅에서 즙리와 습윤 등의 유인에 빠져 사망하고 장왕은 간신히 풀려난다.

이러한 불안정한 정국이 조금 진정되자 장왕은 모든 업무를 중단하고, 조회를 폐지한 채로 매일 사냥과 주연을 벌였다. 몇몇 대신들이 간언을 했지만, 오히려 장왕은 "간언을 하는 자는 대부(大夫)와 상오(常晤)라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런 생활이 3년이나 지속되면서 정계에는 간신들이 들끓게 되었고, 국력은 나날이 쇠락해졌다.

그 뒤로 몇 달이 지나도록 장왕은 여전히 향락을 그치지 않았는데, 오거의 친구이자 또 다른 충신인 대부 소종(蘇從)이 찾아와서 목숨을 걸고 간언을 올리자, 장왕은 비로소 잔치상을 치우고 소종과 마주 앉아 국정을 논하고는, 다음날 그동안 아부하던 간신들을 숙청하고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았다. 3년에 걸친 사치와 향락은, 나라가 너무나도 혼탁해 충신과 간신을 구분할 수 없자, 일부러 사치와 향락을 즐겨 옥석을 가리고자 했던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간신들을 처단한 장왕은 오거와 소종에게 국정을 맡기고 패업을 시작했다. 초 장왕 3년(기원전 611년), 이렇게 매일 같은 방탕의 끝에, 참다 못한 오거라는 신하가 목숨을 걸고 간언을 올렸다.   

 

***사자성어 : 불비불명(不飛不鳴)

뜻 : 날지도 않고 울지도 않는다는 말로, 큰 일을 하기 위해 오랫동안 조용히 때를 기다린다는 뜻

 

-> 충신 오거(五擧)가 연회석 자리에 나와 이렇게 말하였다. “언덕 위에 새 한 마리가 있는데, 3년 동안 날지도 않고 울지도 않습니다. 이는 어떤 새입니까?” 장왕은 매서운 눈초리로 오거를 보더니 말했다. “3년 동안 날지 않았으니 한 번 날면 하늘까지 이를 것이고, 3년동안 울지 않았으니 한 번 울면 세상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할 것이오. 알았으면 물러가시오.” 장왕은 오거의 질문의 의미를 모르는 듯 여전히 음탕한 생활을 했다. 그러자 대부(大夫) 소종(蘇從)이 다시 간언을 했다. 장왕은 그에게 이렇게 물었다. “죽음을 각오하고 있는가?” 소종은 머리를 조아린 채 말했다. “죽음을 무릅쓰고 눈을 뜨시기를 간언하는 것입니다.” 

불비불명(不飛不鳴)

 

 

4) 오합려(吳闔閭)

    중국 춘추전국시대 오나라의 제24대 임금이며, 제6대 왕으로, 휘는 광(光)이다. 춘추 5패의 한 사람으로 꼽기도 한다. 신하인 손무, 오자서 등의 도움을 받아 오나라를 강국으로 성장시키고 패자를 꿈꾸었으나, 월왕 구천에게 패배하여, 부차(합려 아들)에 복수를 맹세하게 하고 죽는다. 그를 묻은 언덕에는 호랑이가 나타났다고 해서, 후치우(虎丘_중국 쑤저우 위치)라고 불렀다.   

 

 

5) 월구천(越句踐)

    오왕 합려는 월에 침입했지만 구천은 그를 격파했다. 오왕 부차는 와신(臥薪)하여 2년 후 회계에서 그를 항복시켰다. 구천은 명신 범려와 상담(嘗膽)하고 기원전 477년 부차를 고소(姑蘇)에서 포위하여 자살하게 하였다. 구천은 북상하여 산둥의 서주에 제후를 모이게 하여 패자가 되었다. 오·월의 싸움은 이 고사를 말한다. 

 

 

***사자성어 : 와신상담(臥薪嘗膽)

뜻 : 원수를 갚기 위해 그 어떤 어려움도 이겨 냄 또는 어떤 일을 반드시 이루어 내겠다는 강한 의지를 나타냄

 

-> 중국 춘추 전국 시대에 오나라의 왕 합려가 월나라로 쳐들어갔다. 하지만 합려는 월나라의 구천왕과 싸우다 전쟁터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 뒤 합려의 아들인 부차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가시가 많은 장작더미 위에서 잠을 자며 복수를 다짐했다. 혹시라도 마음이 약해질까 봐, 부차에게 늘 “부차야! 아비의 원수를 잊었느냐!”하고 외치게 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월나라의 구천왕은 늘 마음이 불안했다. “언젠간 그놈이 쳐들어올 것이다. 그 전에 내가 먼저 쳐들어가야겠어!” 하지만 부차의 군대 앞에 구천왕의 군대는 낙엽처럼 쓰러지고 말았다. 쫓기던 구천왕은 회계산에서 항복했다. “네놈 때문에 내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넌 이제 천한 종이다! 내 발을 닦아라.” 구천왕은 바닥에 엎드려 부차의 발을 닦았다. 부차는 월나라를 오나라의 부하 나라로 삼아 버렸다.

그 뒤 월나라로 돌아온 구천왕은 늘 옆에 곰의 쓸개를 매달아 놓고 입으로 핥으며 복수를 위해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리고 쓰디 쓴 쓸개 맛에 몸서리치면서 잊지 않고 소리쳤다. “너는 회계산의 치욕을 잊었느냐!” 그로부터 20년 뒤, 구천은 복수를 했고 부차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훗날 사람들은 부차가 장작더미 위에 누웠다는 뜻의 ‘와신’과 구천이 쓸개를 핥았다는 뜻의 ‘상담’을 붙여서 ‘와신상담’이라고 불렀다. 

 

와신상담(臥薪嘗膽)

 

 

 

춘추시대 말기의 정세

기원전 453년에는 한, 위, 조 등 3씨가 가장 강대해진 지씨(知氏)를 공략하여 사실상 진을 3등분하여 독립하였다. 이와 같이 귀족이 제후를 억누르고 그 나라의 정치의 실권을 장악하는 현상은 노(魯)나 제(齊)에서도 찾아볼 수 있으며, 춘추 시대 후반의 일반적인 경향이었다.국제적인 외교도 기원전 546년의 송(宋)의 화평회의 등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거의 모두 귀족들의 손에 의해서 행해졌다. 한·위·조 등 3씨는 기원전 403년에 주왕(周王)에 의해 제후로서 인정받게 되지만, 실제로는 기원전 453년 이래 독립국으로서 행동하고 있다. 춘추 시대를 통하여 유력한 대국으로서 제후를 통제해 온 진이 사실상 멸망한 이 해를 고비로 하여 그 전을 춘추 시대, 그 후를 전국 시대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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