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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역사 6] 전국시대(戰國時代)-전국7웅(戰國七雄)의 등장, 양육강식의 시대, 제후에서 왕으로 신분상승, 철기문화, 제자백가 등장 1

by 막장life 2023. 1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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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역사-양육강식의 시대 전국7웅(戰國七雄)의 등장

 

전국시대 (칠웅-진, 초, 연, 제, 한, 조, 위)

전국시대 세력지도

 

 

전국시대는 기원전 403년부터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한 기원전 221년까지 약 180년간을 말한다. 전국시대는 제후들이 왕으로 칭하면서, 주왕의 명령을 받는 형식을 취하지 않고 스스로 결정하여 다른 제후국들을 정복하고자 하였다. 전국시대는 춘추시대에 비해 훨씬 더 치열한 약육강식의 시대였다.

 

이 시대에는 7나라가 강대국으로서 중국의 형세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 일곱 나라들을 7웅(雄)이라고 하며, 진(秦), 초(楚), 연(燕), 제(齊), 한(韓), 조(趙), 위(魏)를 말한다. 칠웅 중 한나라, 조나라, 위나라는 춘추시대의 진(晉)나라가 3개국(삼진(三晋)이라 칭함)으로 갈라진 나라들이다.

 

전국시대를 7웅의 시대라고도 하며, 춘추시대의 오패와 합쳐서 춘추전국시대를 오패칠웅(五覇七雄)의 시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전국시대에도 작은 나라들이 있었으나, 많은 나라가 망하고 7강대국 위주로 재편성 되었다.

 

 

전국시대 특징

1) 정치적 측면

    약육강식(弱肉强食), 적자생존(適者生存) 이라는 사회적 배경 속에서 전쟁은 만연하였고 각 국가는 군사적 힘을 키우는 것이 필수불가결했다. 이에 따라 군국주의(軍國主義) 정책을 썼고, 제후들은 능력있는 인재들을 등용해서 나라를 유지하려 했기 때문에 귀족들의 권력을 약화시키고 관료제(官僚制)가 등장하였으며, 새로 얻은 땅을 제후가 직접 다스리는 군현제(郡縣制)가 나타났고, 국가가 백성을 직접 지배하려는 제민지배(齊民支配) 체제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정책들을 통해 전국시대에는 혈육중심의 씨족공동체가 해체되고 왕의 중앙집권적 성격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또한 사(士) 계급 출신의 관료가 실제의 정치를 장악하게 되어, 그 최고 지위에 상(相)이 놓이게 된다. 정치와 군사가 분리되고 군주가 각 분야의 책임자를 임명하여 선출했다. 그러므로 군제(軍制)에 있어서도 장군이라는 직위가 새로 등장하여 전쟁을 할 때마다 군주가 장군을 임명하였다. 농민이나 일반 백성들 가운데 병사를 징집하기 시작하여 군사 확보에 중점을 두었고 전차군에서 보병으로 변화하는 모습도 보인다.

 

또한 물리적인 전쟁뿐만 아니라 외교정책도 매우 두드러지는 특징을 보였다. 소진의 합종책(合從策), 장의의 연횡책(連衡策), 원교근공책 등의 외교정책을 통해 거대한 진나라와 다른 국가들 간의 첨예한 대립의 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

합종연횡책

 

 

2) 사회적 측면

    제후국들은 살아남기 위해, 그리고 더욱 강성해지기 위해 훌륭한 인재를 등용해야만 했다. 평민 가운데에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 재상이나 장군이 되는 포의장상(布衣將相)의 국면을 열게 되어 귀족 계급이 약화되었고, 평민들의 정치 참여가 많아 졌으며, 귀족이 아닌 평민들에게도 높은 벼슬에 오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또한 각국의 국군들이 인재를 다투어 초빙하는 풍조로 인해 능력이 있는 사람은 각국의 국군을 찾아가 각자 나름대로의 부강의 법을 설파하면 관직을 얻고 후한 봉록(俸祿)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출신에 상관없이 능력만 있으면 인정을 받았기 때문에 다른 나라 출신의 재상, 즉, 객경(客卿)들이 출현하게 되었다. 대표적인 예로 여불위(呂不韋), 장의(張儀), 상앙(商鞅) 등이 있다.

 

제후국 사이에는 자기 소유의 영토 개념이 나타나면서 국경이 명확해지고 본격적으로 영토국가(領土國家)의 모습을 띄게 되었다.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작은 촌토(寸土)라도 소유하려고 했으며, 이를 직접 관할하기 위해 중앙에서 지방에 관리를 파견하여 다스렸다.

킹 메이커 여불위

 

 

 

3) 사회적 측면

    토지의 사유화가 허락되면서 대토지 소유자가 등장했으며 귀족에게 예속되었던 상공업이 자유롭게 영위되면서 대상인이 등장했다. 이들은 지조를 받고 타인에게 경작시켰으며 농사법에 있어서는 춘추시대(春秋時代)의 우경법(牛耕法)을 바탕으로 철제 농구를 사용하여 경작지를 확대하고, 또 심경법(深耕法)이 도입되어 생산량이 대폭 증가했다. 심지어 말을 이용하는 마경(馬耕)도 일부 시작되었다. 뿐만 아니라 관개의 장려 또한 농업의 발전을 더욱 촉진 시키는 데에 기여했다.

 

철기 농기구의 보급과 생산 기술의 개량은 수공업의 발전을 가져왔으며 소금, 야철, 칠기 등의 신흥 수공업으로 등장하였다. 또한 철제 공구가 다양해지면서 서서히 청동제를 대체했다.

 

그 외에도 제련업, 제도업, 제염업, 칠기 도예 등의 다양한 분야의 수공업이 발달했으며 농업의 부업으로서 자리 잡아 가정 수공업 이외에 관영과 민영 수공업으로 나누어지고 있다. 농업과 수공업의 발달은 상업과 도시의 발달을 촉진시켰다. 이에 따라 화폐도 대량으로 사용되기 시작했으며 새로운 도시들이 생겨났다.

 

철기농기구

 

 

 

4) 문화적 측면

    전국시대의 문화는 제자백가와 철기문화 두 가지를 가장 주목해 볼 만 하다. 전국시대 군주들은 자신의 부국강병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능력을 겸비한 인재가 필요했다. 이러한 국가적 수요가 사회적 신분 질서의 동요와 맞물리면서, 사회 구성원의 대대적인 신분 상승 욕구에 부응할 새로운 지식의 형태가 요구되었다.

 

따라서 다수의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민간교육이 등장하였으며 대표적인 예로 공자와 묵자의 학단이 있다. 이들은 제자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사상을 제자들에게 자유롭게 전달하였고, 그 제자들은 다시 여러 지역으로 흩어지면서 그 영향력을 확대했다.

 

국가 차원에서도 이러한 인재들을 양성하였는데, 제 선왕이 전국 각지의 유능한 인재들을 모아 직하학궁(稷下學宮)을 만들어 자유로운 학문 교류를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로 인해 다양한 사상이 출현하게 되었는데 이를 '제자백가’라고 부른다.

 

제자백가에서도 주류를 이루었던 사상은 인도주의의 유가, 엄벌주의의 법가, 겸애와 비공론을 주장하는 묵가이다. 도가는 당시 현실과는 다소 거리가 있어 제후들의 환영을 받지 못했다.

제자백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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