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역사-중국의 최초국가 상왕조(商)의 탄생
전설속의 국가가 될 뻔한 상나라
상나라는 중국 최초의 역사적 국가이다.기원전 1600년에서 기원전 1046년까지 존재하였으며 수도의 이름에서 따와 은나라 (殷) 라고도 부른다. 한때 전설상의 국가로 인식되었으나 은허와 갑골문의 발견으로 실존하였다는 사실이 입증되어 중국 최초의 국가로 인정받고 있다.
청나라 시대에 고대 기록을 의심하는 의고학이 득세하면서 한때 실존이 의심되기도 했으나 1899년에 갑골문이 발견되어 세상에 알려지면서 학자들 대부분이 상나라는 실존했던 나라라고 인정한다고 하는데, 좀더 정확히는 갑골문이 처음 발견된 시점만 해도 약재로 인식한 사람도 많았고, 상나라의 실존이 의심의 여지가 없게 된 것은 1920년대 후반 이후 은허의 발굴이라고 할 수 있다.
상나라의 시조 설(契)
상나라의 시조인 설(契)의 어머니는 간적으로 유융씨 부족의 딸이며 제곡의 둘째 부인이었다. 간적 등 세 사람이 함께 목욕을 갔다가 제비가 알을 떨어뜨리는 것을 보고 간적이 이를 받아 삼켜 잉태하여 낳은 아이가 바로 설(契)이다. 설(契)은 장성하여 하나라 우(禹)의 치수산업을 도와서 공을 세웠다. 순(舜)이 설(契)에게 '백관이 화친하지 않고 오품이 화목하지 못하니, 그대가 사도를 맡아서 오교를 정중히 전파하고, 백성들을 너그럽게 감화시켜주시오'라고 명하였다. 순(舜)은 설(契)에게 상(商)을 봉지로 내리고 자씨(子氏)라는 성을 하사하였다. 설(契)은 요, 순, 우 시기(오제, 하왕조 시기)에 등용되어 백관을 위해서 일했으므로, 그의 공적은 백관들 사이에 칭송되었고, 백관들은 안정을 얻게 되었다.
하왕조 폭군 걸왕(桀)을 몰아내고 상나라를 세운 탕왕(湯)
중국 상(商)나라의 초대 국왕. 묘호는 태조(太祖), 왕호는 대을(大乙), 휘는 리(履). 성탕(成湯), 성당(成唐) 등 여러 이칭으로도 불린다. 시호는 태무왕(太武王). 아버지는 기종(夔宗) 시계(示癸). 명재상 이윤(伊尹)의 보좌로 명조(鳴條) 전투에서 대승하며 하(夏)나라의 폭군 걸왕(桀王)을 패사시켰다. 박(亳)에 수도를 정하고 상(商) 왕조를 건국했으며 제도를 정비했다. 사마천의 《사기》에 따르면 설부터 탕왕까지 총 8번을 천도했다고 하며, 이후 제후 정벌에 나섰다. 그런데 갈의 우두머리인 갈백이 제사를 올리지 않자 갈을 정벌했으며, 걸왕이 황음한 짓을 계속 일삼자 제후인 곤오씨가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에 탕이 제후들을 통솔해 곤오씨를 정벌한 후, 걸왕을 공격해 정벌했다. 이후 역법을 고쳤다고 전해지며, 그가 승하한 후 외병이 왕위에 올랐다.
상나라 이전에도 중원에는 여러 성읍국가들이 병존했고, 하나라가 실존했더라도 그 중에서 가장 강한 성읍 또는 부족일 뿐이다. 현대인들은 하나라가 망하고 상나라가 건국되었으며 주나라가 상나라를 정벌하고 세워졌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이와 다르다. 중국 청동기 시대는 아직 후대의 진, 한과 같은 중앙집권국가는 등장하지 않았다. 하→상→주 교체는 가장 강한 성읍 또는 집단의 교체일 뿐 전 왕조가 외부의 침입으로 망하고 새 왕조가 들어선 것이 아니다.
고대 그리스에서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패권 경쟁 즉 펠로폰네소스 전쟁 전후로 패권이 아테네에서 스파르타로 넘어간 것처럼 명조대전과 목야대전 전후로 패권이 하→상, 상→주로 넘어간 것이다. 또 패권이 스파르타에 넘어갔다고 아테네가 멸망한 것은 아닌 것과 비슷한 맥락으로 하, 상이 패권을 잃었다고 나라가 멸망한 것은 아니었다. 정리하자면 패권을 쥔 성읍은 하→상→주 순으로 바뀌었지만, 기타 여러 성읍의 지배계층과 주민들은 큰 변화 없이 유지되었다.
상왕조의 마지막왕 주왕(纣)과 중국 4대 악녀 달기(妲己)
주왕 (紂)
제신(帝辛,?~기원전 1100년 경)은 주(紂), 주신(紂辛), 주왕(紂王)이라고도 불리며, 상나라의 제30대 왕으로 마지막 군주이다. 성씨는 자성(子姓)이다. 서백후(西伯侯) 희창(姬昌)을 강제로 납치하여 감금하였다. 희창이 죽은 후, 희창의 아들 희발(姬發), 즉 서주(西周) 무왕(武王)이 아버지를 보복하기 위해서 강태공(姜太公) 등의 부하들과 함께 주왕에 반역하였다. 반란군은 맹진에서 주왕과 대치하였으나 실패하였고, 은허 남쪽의 목야에서 벌어진 2번째 전투때는 주왕을 패배시켰다.
은의 도읍으로 들어가지만, 주왕을 체포할 수 없었다. 주왕은 패배한 이후 누대에 올라가 자살하였고, 상나라는 멸망한다. 실제 역사에서 그는 실정보다는 동남방 회하 유역의 동이족 국가 인방(人方)에 대한 장기간 원정에 힘을 쏟다가 주나라 무왕의 반란으로 나라를 잃었다. 그 최후는 역사서마다 다르게 서술되어 있으며,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주나라 성립 이후에, 제신(帝辛)은 희대의 폭군으로 묘사되었다.
비공식 설화에 전해지는 그는 달기(妲己)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고 성격이 난폭하여 간언을 하는 사람을 그 자리에서 살해하였으며, 궁궐이 초라하다고 해서 화려하게 만들고, 주지육림(酒池肉林, 술로 연못을 채우고 나무에 고기를 거는 것) 국가 예산을 많이 낭비하였으며, 사람을 숯불에 태워 죽이는 '포락지형(炮烙之刑)[1]을 새로 제정하여 원성을 샀다고 전한다.
달기 (妲己)
달기(妲己)에 관한 기본사료는 《사기(史記)》 「은본기(殷本紀)」로, 그에 따르면 제신 즉 주왕은 달기를 몹시 총애하여 그녀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들어주었다고한다. 이로 인해 강황후의 질투를 받았고, 사이가 좋지 못했다. 어느 날 자객 강환이 주왕을 습격했고, 달기는 이를 강황후에게 덮어씌웠다고 한다. 자백을 받기위해 눈을 파내는 등 악행을 저질렀고 결국 강 황후는 사망하게 된다.
악사(樂師) 사연(師涓)을 시켜서 음탕한 음악인 북도지무(北鄙之舞) ・ 미미지악(靡靡之樂)을 만들었다. 무거운 세금을 거두어 녹대(鹿臺)에 전(錢)을 가득 채우고 거교(鉅橋)에는 곡식을 가득 채운 채, 사냥개와 말, 진기한 물품들로 궁실을 가득 채웠다. 사구(沙丘)의 원대(苑臺)를 넓혀서 들짐승과 날짐승을 모아 그 안에 풀어 길렀으며, 귀신을 깔보고 사구에 많은 사람들을 모아 즐겨 놀았다.
술을 채운 연못에 고기를 걸어둔 숲(주지육림)을 만들어서 나체의 남녀를 서로 뒤쫓게 하는 등 날마다 음탕한 밤을 보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이들에게는 기름을 칠한 구리 기둥 아래 불을 피운 뒤, 그 위를 걷게 하는 포락이라는 형을 구경하면서 웃고 즐기거나 돈분이라는 형을 만들어 구덩이에 독사와 전갈을 집어넣고 괴로워 하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그 뒤 달기는 주(周)가 제후들을 규합해 은을 쳐서 멸망시킬 때 무왕(武王)에 의해 살해되었다(《사기》).
《열녀전(列女傳)》 권7 잉첩전(孽嬖傳)의 은주달기(殷紂妲己)조에는 포락(炮烙)이라는 형벌을 보며 달기가 웃었다고 한다. 재상 비간(比干)이 "선왕(先王)의 전법(典法)을 따르지 않고 아녀자의 말만 따르시니 재앙이 가까울 날이 머지 않았습니다."라고 간언하자, 달기가 주왕에게 "성인(聖人)의 심장에는 일곱 개의 구멍이 있다고 들었습니다"고 답하면서 주왕을 부추겨 비간의 심장을 도려내서 감상하였다. 주왕이 자살한 뒤, 달기도 무왕에 의해 참수되어 목이 작은 백기(白旗)에 걸렸고, "주왕을 망친 것은 이 여자다"라는 비난을 받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