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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역사 15] 초한지(楚漢志)-항우의 입지가 상승하게된 거록대전, 진나라 명장 장한, 죽기살기로 싸운 항우군대 파부침주, 한나라(漢) 건국 과정 2

by 막장life 2024. 2.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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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 건국과정

항우의 입지가 상승하게된 전투, 거록대전(巨鹿之戰)

 

후초를 일으킨 항량(項梁), 서초패왕 항우(項羽), 진나라 마지막 명장 장한(章邯)

 

 

 

진나라 몰락과 진나라 명장 장한(章邯)의 등장

BC 209년 벌어진 진승·오광의 난(陳勝吳廣─亂)은 통일제국 진나라에 치명타를 가져왔다. 이 반란 자체는 한때 함양이 함락될 수도 있었던 위기에서 진나라 최후의 명장 장한(章邯)의 활약으로 간신히 진압할 수 있었으나, 이틈을 타 과거 진나라에 멸망당했던 전국시대(戰國時代) 육국(六國)의 후예들은 재빨리 나라를 부활시키거나, 혹은 야망을 가진 인물들이 들고 일어나서 과거 육국의 왕족들을 얼굴마담으로 내놓고 봉기하는 등 천하에 난리가 벌어졌다.

 

개중에 가장 주목할 인물은 단연 항량(項梁, 초나라 명장 항연의 아들, 항우의 숙부)으로, 명문가의 후예였던 그는 회계 임시군수인 은통(殷通)을 죽이고 과거 진나라에 맞서는 최강의 열국이었던 초나라를 부활시켰다. 회계에서 세력을 키운 항량은 진나라 눈을 피해 시골에서 양치기 일을 하고있는 웅심(熊心)을 찾아내어 명분을 내세우기위해 그를 회왕(懷王)으로 추대했다. 조카 항우와 함께 승승장구하던 항량은 자만에 빠져 진나라 명장 장한과 붙게되지만 장한에게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위기의 조나라

이후 진나라 장한군은 북으로 진군하여 조나라를 공격했다. 당시 조나라는 진승의 부장이었던 무신(武臣)이 하북을 평정하고 독립을 한 상태였는데, 장한은 무신의 부하였던 이량(李良)의 도움을 받아 조나라 수도 한단(邯鄲)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무신을 살해했다. 이에 조나라의 중신이었던 장이(張耳)와 진여(陳餘)는 황급히 조헐(趙歇)이라는 인물을 새로운 조나라 왕으로 세운 뒤, 거록(巨鹿)으로 도주했다.

 

이에 장한은 수하 장수 왕리(王離)을 보내 거록을 포위토록 하여, 조나라는 엄청난 위기에 빠졌다. 당시 장이는 조헐을 데리고 거록으로 들어갔지만, 진여는 따로 성 밖으로 나가 북쪽으로 가서 수만의 군세를 수습해서 남하했으나, 워낙 진나라군의 기세가 강력하여 함부로 달려들지를 못했다.

 

이에 반해 거록 내부에서는 양식이 바닥나고 있었고, 병사들의 숫자도 많지않아 위급한 상황이었다. 워낙 성 내부에서는 답이 없는 상황이었기에 장이 등은 성 밖의 진여에게 수차례 사람을 보내 도움을 요청했지만, 답이 없기는 진여도 마찬가지였기에 뭘 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거록에서 몇 개월이 지나자 악이 바친 장이는 진여에게 성을 내었고, 이에 진여는 어쩔 수 없이 장염(張黶)진택(陳澤)이라는 인물에게 5천 명을 주어 한번 돌격하게 해보았지만, 5천 명은 진나라 군에 접근하기가 무섭게 녹아내리고, 단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했다. 이 절망적인 형세에서 곧 반전이 일어나게 된다.

 

이렇게 조나라는 죽어가는 소리를 내며 어떻게든 도움을 갈구했고, 조나라가 무너지면 다음은 자신들 차례가 될 것이 뻔했기에 연나라(燕), 그리고 초나라 등 모든 나라에서 지원군을 보내기 시작했다. 이 중 핵심은 초나라였다.

 

 

 

송의(宋義)를 참살한 항우

 

이때 초회왕은 장한의 기세에 수도를 우이(盱胎)에서 팽성(彭城)으로 옮겼고, 새로 부대를 조직해서 지원군을 보내려고 하였는데, 이때 일전에 송의와 대화를 나눴던 고릉군이 부대의 지휘관으로 송의를 추천하였다. " 송의가 얼마 전에 무신군의 군사는 필시 진군과의 싸움에서 패할 것이라고 예언한 적이 있었습니다. 과연 며칠 후에 초군은 진군과의 싸움에서 패하고 무신군은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군사들이 싸워보기도 전에 그 패전을 미리 예언한 송의야말로 가히 군사의 일을 알고 있다 하겠습니다." 이에 초회왕은 송의를 상장군으로 삼고, 항우는 차장(次將)으로 임명하며, 범증(范增)을 말장(末將)으로 삼아 지원군을 조나라로 보냈다.

 

그보다 앞서, 초회왕먼저 관중(關中)에 입성하는 사람이 그곳의 왕이 될 것이다.라고 엄포를 내려놓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다른 장수들은 관중으로 향하는 건 꺼리고 있었는데, 항우만은 항량이 살해된 일(진나라 장한에 의한 숙부 항량의 죽음)에 격분하여 서쪽으로 향하기를 원하고 있었다. 서쪽으로 향하고 싶었던 항우가 조나라로 향한 것은 항우를 꺼린 여러 늙은 장수들 때문이었다.

 

초회왕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항우는 심심하면 사람을 죽이니, 이 경우에는 유방을 보내 적당히 다독이는 편이 낫다.면서 유방을 추천했던 것. 그 때문에 서쪽으로 향하는 것은 항우가 아닌 유방이 되었다. '경자관군'(卿子冠軍)이라고 불린 송의와 항우의 부대는 이렇게 해서 서쪽이 아닌 북쪽으로 행군을 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송의는 안양(安陽)에서 46일 동안 머문 채 진군을 하려고 하질 않았다. 답답해진 항우는 직접 송의에게 따져 물었다. "진이 조를 포위하여 급한데, 마땅히 빨리 군사를 이끌어 황하를 건너야 하고, 우리 초가 그 외곽을 치고 조는 안에서 호응하면 진군을 깨트리는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송의는 항우의 의견을 무시했다.

 

항우로서는 열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는데, 송의는 한술 더 떠 싸우러 나와서는 아들인 송양(宋襄)을 제나라의 재상이 되게 하는 데 힘을 쓰고, 아들을 배웅한답시고 술을 마시면서 신나게 연회를 하며 놀았다. 당시는 이미 11월 즈음이라 날씨가 추웠는데, 마침 비까지 내려 병사들은 굶주림과 추위 때문에 힘들어 하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를 지켜보던 항우는 병사들을 선동했다."모든 힘을 다해 진군을 협격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한 곳에 머물고 앞으로 나아가지 않아 그 기회를 놓치고, 이제는 세상에 기근이 들어 백성들은 굶주리고 사졸들은 콩잎을 먹으며 연명하고 있을 정도로 군중에는 군량미마저 동이 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식은 호화로운 연회를 열어 음주가무를 즐기고 있으면서 군사들을 이끌고 하수(河水)를 건너 조 땅의 식량을 먹이고 조군(趙軍)과 함께 힘을 합해 진군을 공격하지도 않으면서 입으로만 ‘그들의 피로함을 엿보고 있다.’라고 말하고 있다. 무릇 강한 진나라가 새로 건국한 조나라를 공격한다면 아마도 그 세가 아마도 조나라를 압도할 것이다." "조나라는 결코 강한 진나라의 상대가 될 수 없음에도 어찌 그들의 피로하기를 기다린다는 말인가? 얼마전에 우리의 군사들이 진군에 의해 패함으로써 좌불안석이 된 왕은 경내의 모든 군사들을 내어 장군에게 내어주어 나라의 존망은 이 한 번의 출격에 달려 있음에도, 오늘까지 사졸들을 돌보지 않고 그 사사로움만 구하고 있으니 송의라는 자는 사직을 지킬 수 있는 신하가 아니다!"

 

그렇게 분위기를 만든 항우는 적당한 타이밍을 봐서 어느 날 새벽에 송의의 막사를 기습, 그 자리에서 목을 베어 버리고, 장수들에게 "송의 이놈이 모반질을 해서 전하가 죽이라고 명령하셨음."이라고 군령을 위조했다. 다른 장수들이라고 그 내막을 모를 리는 없겠지만, 항우의 포스가 너무 엄청나서 모두 항우를 떠받들었다. 그렇게 임시로 상장군이 된 항우는 송의의 아들을 추격하여 살해하고, 환초(桓楚)를 시켜 초나라에 보고를 하게 했다. 초회왕은 항우를 상장군으로 임명했다. 그 당시 항우의 위세는 가히 초나라를 뒤흔들었다. 항우는 지체하지 않고 북상, 조나라 구원전에 참여했다.

 

 

파부침주(破釜沈舟)

 

 

죽기살기로 싸운 항우 부대, 파부침주(破釜沈舟)

 

항우는 본대를 이끌고 북상하고 있었지만, 전군이 도달하는 일은 아직 시간이 필요했고 거록은 오늘 내일 하는 상황. 우선 항우는 영포포장군에게 2천명의 병력을 주어 서둘러 황하를 건너 거록을 구원하도록 명령했다. 두 사람은 즉시 부대를 이끌고 황하를 건너 거록에 도착했고, 바로 교전을 벌였다.

 

전력상 한순간에 승부를 낼 수는 없었지만, 조금 유리한 상태를 만드는 데는 성공했고, 이를 바탕으로 하수 북쪽 강안에 진영을 만들었다. 초나라 군이 당도한 것을 본 진여는 안달하며 다시 한번 구원을 요청했다. 항우는 진여의 요청을 듣자 이제 황하를 건넜는데, 건너고 나서는 타고 온 모든 배를 침몰시켰고, 임시로 세워둔 집과 가져온 솥과 시루 마저도 전부 부셔버렸다.

 

초나라의 군대는 단 3일간의 양식만 지니게 되었는데, 여기서 죽더라도 돌아갈 마음이 없음을 보여주는 행위였던 것이다. 여기서 나온 고사가 파부침주(破釜沈舟)이다. 여기서 초군이 대패하고 진군이 조나라를 멸망시킨다면, 승산은 전혀 없어지고 제후들에게는 암흑의 세상이 다시 도래할 뿐이었다. 그야말로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야 하는 상황이었다.

 

 

 

 

마침내 도착한 항우는 곧 왕리의 군대와 회전(會戰)에 돌입했다. 이미 영포 즉, 경포가 몇 차례 진군을 격파하여 진군이 당혹스러워하는 사이, 항우는 진군과 사생결단을 낼 기세로 맹렬하게 힘 대 힘의 전투를 치렀다. 항우는 장한의 용도를 끊어버렸고, 이에 진군은 식량이 이제 부족하게 되었다. 서로 군량이 바닥나 내일을 볼 수가 없는 상황에서, 양군은 무려 아홉 번이나 어마어마한 대전을 벌였고, 마침내 진군이 크게 무너져 버렸다.

 

진나라 장수 소각(蘇角)은 전투 중에 살해당해 버렸고, 섭간(涉間)은 싸움에서 패망하게 된 것이 확실해지자 항복을 하지 않으려 불길에 몸을 던져 자살해 버렸다. 지휘관이었던 왕리는 항우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양군이 뒷일을 생각하지 않고 처절하게 맞붙었던 만큼, 전장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압도적일 정도로 무시무시했다.

 

초나라 병사들은 항우의 지휘 아래 엄청난 전투력을 발휘해서 한 사람이 진나라 병사 10명을 당해 내지 못하는 사람이 없었으며, 부르짖는 소리는 천지를 뒤흔들었다. 이때, 항우를 제외한 다른 제후들은 거록 주변에 10개의 영채를 세우고 전투를 지켜보고 있었지만, 그 엄청난 살육전의 분위기에 압도당해 아무도 함부로 움직이지 못했고, 그저 벌벌 떨거나 식은땀만 흘리면서 지켜보고 있었을 뿐이었다.

 

마침내 항우는 진군을 격파한 후, 제후들의 부대를 불러모았다. 제후들은 항우에게 불려 가며 원문 아래로 들어갔는데, 모든 제후들이 무릎으로 질질 기어서 앞으로 나아갔고, 감히 고개를 들어 항우를 바라보는 제후도 없었다. 이로서 항우는 대번에 모든 제후들을 제압하여 제후들의 상장군이 되었고, 제후들은 모두 항우에게 속하게 되었다.

 

 

항우에게 항복하는 진나라 명장 장한

항우에게 항복하는 장한

 

 

이로써 조나라는 진나라 부대의 압력에서 벗어났고, 몇개월 동안 거록 내부에서 벌벌 떨며 지내던 조왕 조헐과 장이는 성 밖으로 나와 기뻐하며 모든 제후들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사태가 이리되자 가장 난감한 지경에 처해진 것은 장한이었다.

 

장한은 사태가 좋지 않음을 깨닫고 후퇴를 하고 싶었지만, 2세 황제 호해(胡亥)의 반대 때문에 이것조차 불가능했다. 그는 부하인 사마흔(司馬欣)을 함양으로 보내 자초지종을 설명하려고 했지만, 사악한 간신 조고(趙高) 때문에 이것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게다가 항우의 부하인 포장군이 진군을 격파했고, 조나라의 진여 역시 장한에게 항복을 권유했다. 고민하던 끝에 장한은 은허(殷墟)에서 항우를 직접 만나 눈물까지 흘리면서 항복했다. 멸망 직전의 진나라를 지탱한 것은 오로지 장한 개인의 군사적 능력이었으므로, 이 시점에서 진나라는 사실상 멸망한 것이나 다름없게 되었다. 항우는 장한을 옹왕(雍王)으로, 사마흔을 상장군으로 임명해서 대접해 주었고, 곧바로 함양을 향해 진격하기 시작했다.

 

 

 

 

 

거록대전의 결과 및 영향

사실상, 이 전투로 인하여 반란군들을 하나하나 분쇄하며 승승장구하던 진나라는 바로 멸망을 확정 짓게 된다. 춘추시대부터 이어진 진나라의 역사를 마지막으로 장식하는 전투라고 보아도 무방하며, 만약 이 전투에서 진나라가 승리했다면 그 시점에서 장한을 저지할 수 있는 제후는 전 중국에 아무도 없었을 테고, 진나라는 멸망은 피할 수 없었더라도 최후에 직면하게 되는 순간은 늦춰졌을 것이다.

 

그러나 거록의 패배로 진나라는 그 역사에 사실상의 마무리를 짓게 되었다. 제후들에게 이 승리는 진승의 반란 시점부터 일어난 각지에서의 저항 중 가장 완벽한 승리였다. 또한 장초의 멸망과 위나라의 최후 등, 계속해서 이어진 절망적인 상황의 분위기를 대번에 바꿀 수 있게 된 계기였다.

 

항우 본인으로 말하자면 숙부 항량의 뒤를 잇고, 바로 부대를 탈취한 위태로운 외줄타기 상황에서 단번에 자신을 전 중국 최강의 사나이로 만들었던 무대가 되었다. 왕리를 포로로 잡고 모든 제후들이 땅바닥을 기어다니게 만들었을 때, 항우는 이미 일개 지휘관이 아니라 중국의 지배자였다.

 

 

 

 

항복한 20만 진나라 병사들을 학살한 항우, 신안대학살

 

신안(新安)에 이르렀을 때 과거 제후군의 장병들이 부역과 수자리에 징발되어 진을 지날 때 진의 장별들이 그들을 무례하게 취급하는 일이 많았다. 지금 진의 군대가 제후군에 항복하자 제후군의 장병들이 승리한 기세로 진의 장병들을 마구 노예처럼 부리고 욕을 보였다.

 

진의 장병들이 몰래 “장한 장군 등이 우리를 속여 제후군에 항복하게 했다. 지금 관중에 들어가 진을 격파하면 가장 좋겠지만, 그러지 못할 경우 제후군은 우리들을 포로로 삼아 동쪽으로 도망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진은 분명 우리 부모와 처자식을 다 죽일 것이다”며 속닥거렸다.

 

제후군에서 이 이야기를 듣고는 항우에게 보고했다. 항우는 경포와 포장군을 불러 “진의 장졸들이 아직 수가 많은데 마음으로 복종하지 않는다. 관중에 이르도록 말을 듣지 않으면 일이 위태로워질 것이 분명하니 쳐죽이는 것만 못할 것이다. 장한, 사마흔, 도위 동예만 데리고 진으로 들어가자”라는 계책을 내놓았다. 그리하여 초군은 밤에 진의 병졸 20여 만 명을 신안성 남쪽에다 파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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