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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중국역사 13] 진나라(秦)-진시황제의 업적 및 폭정, 진나라의 멸망

by 막장life 2024. 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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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제의 업적 및 폭정 & 진나라의 멸망

 

 

진시황제의 업적

1. 영토확장

   광저우 인근의 해안가까지 모두 장악하였고, 푸저우와 구이린 지방까지 새롭게 중국의 영토로 포함시켰다. 진나라 군대는 이에 그치지 않고 베트남의 하노이 인근까지 진군하였으며 남부 국경을 안정시켰다. 정벌 사업이 끝나자 시황제는 10만 여명에 달하는 한족인들을 이 지방으로 강제로 보냈으며, 정착하고 인근을 한족화시키도록 하였다. 이같이 철저한 동화사업으로 인하여 시황제는 남부 국경을 안정시키는 데에서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진나라 영토 지도

 

 

 

2. 흉노족을 막기위한 만리장성 축성

   흉노족이 북부 지방을 약탈하자 시황제는 몽염(蒙恬) 장군을 보내어 기원전 215년 경에는 흉노를 정복하였고 오르도스 지방에 농업을 전파하였다. 다만 이 지역의 농업화와 한족화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였고, 흉노는 끊임없이 이 지역을 침략해 들어오게 되었다. 시황제는 이후 흉노족을 막기 위하여 북부 국경에 만리장성을 세웠으며, 흉노가 주력인 기병과 말들을 이끌고 쉽게 국경지대를 넘어오는 것을 막고자 하였다. 야사에 의하면 시황제가 예언가에게 '진나라를 망할 자는 호(胡)이다(亡秦者胡)'라는 말을 듣고, 이 호가 흉노를 뜻한다고 생각하여 만리장성을 세웠다고 전한다. 다만 사실은 이 '호'가 흉노가 아니라 그의 뒤를 이어 황위에 오른 2세 황제 호해라는 것이다.

 

 

 

 

 

3. 군현제 실시 및 법가사상을 통한 중앙 집권 체제 강화

    나라를 군과 현의 행정 지역으로 나누어 쪼갠 후에 중앙 정부 소속의 관리들을 파견하여 다스리는 군현제를 실시함으로써 중앙 집권 체제를 더욱 공고히 하였다. 군현제의 실시는 주나라가 봉건 제도로 나라를 다스리던 중에 지나치게 성장한 제후국에 의해 멸망당한 것을 선례로 삼았을 가능성이 크다. 시황제는 이러한 중앙 집권 체제 강화를 위해서 진나라의 통치 이념이 되었던 법가 사상을 중국 전역의 통치 이념으로 내세우는 등 사상 개혁도 시도하였다. 

 

 

 

 

 

4. 문자(소전체), 도량형, 화폐, 도로 규격 통일

문자의 통일(소전체) 

  전국시대 진나라의 문자는 주문(籒文) 즉 대전(大篆)으로 서주 이래 춘추전국의 문자에서 이어온 상당히 정돈된 서체였다. 반면 육국의 문자는 진나라의 문자와 많은 차이가 있으므로 진시황은 승상 이사(李斯)의 제의를 받아들였고, 서동문(書同文-문자자체 표준화 정책)을 실시해 문자의 통일을 단행하였다. 다시 말하면, 육국의 문자 중 진나라의 문자와 다른 형체를 폐지하고, 진나라 고유의 서체인 주문(籒文), 즉 대전의 형체를 기초로 간략하게 줄이고 삭제하여 고쳤다. 그 결과 자형이 정연하고 필획이 고른 새로운 서체인 소전이 탄생하였다. 통일 전 대전체(=주문), 통일 후 소전체

 

 

각 국의 문자체와 진나라 통일이후 통일된 문자 소전체

 

 

 

도량형 통일

  진시황은 도량형 제도를 만들어 공표하고 표준이 되는 자와 저울, 되를 대량으로 만들어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당시 지역마다 제각각이었던 도량형을 하나로 통일한 것이다. 당시에는 비단이나 모시 같은 천으로 세금을 내는 게 일반적이었다. 이런 이유로 길이를 측정하기 위한 정확한 척도가 필요했다. 도량형이 통일되지 않았기에 백성의 자로는 분명 맞는 길이인데 관리의 자로 재면 부족하게 측정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발생했다. 들쑥날쑥한 도량형이 백성을 수탈하는 수단으로 악용될 여지가 많았다. 이에 도량형을 통일시켜 지방관리의 부정부패로부터 백성을 구제하기 시작하였다.  

 

도량형을 통일한 진시황 (출처 : 한국표준과학연구원)

 

 

 

화폐 통일(반량전 半兩錢 )

  반량전(半兩錢)은 중국 진나라부터 전한 시대까지 사용한 청동 화폐를 말한다. '半兩'이라는 글자가 새겨져있다. 기원전 221년 진나라의 시황제는 중국을 통일하고 중앙집권을 강화하기 위해 진~한에 주조된 화폐로서 문자와 도량형을 통일함과 동시에 화폐제도를 통일하여 유일한 화폐로 정했다. 기존의 전국시대에는 '포전'(布錢)과 '도전'(刀錢)같은 화폐가 통일되지 않은 채로 사용되고 있었다. 반량전은 진나라 시황제 때 만들어졌다. 가운데 네모난 구멍이 뚫려 있는 원형이며, 둘레의 테는 없고, ‘반량(半兩)’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형태에서 원은 하늘을, 사각형은 땅을 상징하는 것으로 동전 하나에서 하늘과 땅을 동시에 볼 수 있다는 심오한 사상이 숨어 있다. 또한 가운데의 사각 구멍은 제조와 유통상의 기능적인 측면을 고려한 결과였으며, 사각 구멍에 금속막대를 넣어 고정시켜 한꺼번에 줄질하기 쉽게 했다.

 

 

각 국의 화폐와 진나라 통일이후 통일된 화폐, 반량전(半兩錢)

 

 

 

 

도로규격 통일

  진시황은 수레의 폭을 6척(약 135㎝)로 통일하고, 전국에 걸친 도로망을 정비했다. 통일된 수레바퀴의 폭은 후에 한나라에도 계승되었으며, 최근 조사된 한대 장안성(長安城) 성문에 남아 있는 바퀴자국의 흔적에서도 이 사실이 확인 할 수 있다. 또한 지금의 고속도로에 해당하는 치도(馳道, 폭 70m의 황제순행용 대규모 간선도로)를 건설해 지방에 대한 중앙의 통제를 강화했다. 중원과 서남 지역과의 관계를 강화하기 위해 5척 넓이의 오척도(五尺道)를, 영남과 통하도록 신도를 만들었으며, 북쪽 오르도스 지역을 넘어 구원군(九原郡, 지금의 내몽고 바오터우包頭 남서쪽 멍자완촌孟家灣村)에 이르는 직도(直道)도 건설했다. 도로건설은 본래 지방의 반란을 신속한 군대의 이동으로 효과적으로 진압하기 위해 만든 것이지만, 도로건설 때 각국이 건설한 방어기지와 성채 등을 부수어 할거의 기반을 없애는 데도 도움이 되었으며 이후 교통과 상업의 발달에도 기여했다.

 

 

수레 모습

 

 

 

진시황제의 폭정

1. 방사(方士)의 유언비어와 진사황의 불로장생(不老長生)의 염원

    진시황은 천하를 통일한 이후, 자신의 호칭을 진왕(秦王)에서 황제(皇帝)로 격상시키고, 태산(泰山)에 올라 제사를 지내며, 업적을 기리는 비석을 세우는 등 자신의 권위를 강화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이에 기원전 219년, 제나라 사람 서복(徐福)이 진시황에게 아래와 같은 이야기를 한다.

 

“해중(海中)에 삼신산(三神山)이 있다. 이름은 봉래(蓬萊), 방장(方丈), 영주(瀛洲)라고 한다. 선인(仙人)이 여기에 있다. 청컨대, 재계(齋戒)하여 동남녀(童男女)와 함께 그것을 얻을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그것은 불로불사(不老不死)의 약을 말한다. 이에 진시황은 동남녀(童男女) 3천여 명과 보물로 선단을 꾸려 장생불사의 선약을 구해 올 것을 명했으나 서복은 오랫동안 찾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시황은 함양 내의 방사들을 시켜 불로불사의 약을 찾도록 한다.

 

진시황은 연(燕)나라 사람 노생(盧生)에게 선문고(羨門高)라는 선인을 찾아가게 하였는데, 아무리 찾아보아도 선인이 나타나지 않자 노생은 진시황에게 아래와 같은 변명을 한다. “신들이 영지(靈芝), 선약(仙藥), 신선을 찾아다녔으나 매번 만나지 못했는데, 마치 이것을 방해하는 것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저의 소견으로는 황제께서 때때로 미행(微行)하시어 악귀를 물리치시고, 악귀가 물리쳐지면 진인(眞人)이 올 것입니다. 황제께서 머무르시는 장소를 신하들이 알게 되면, 신선이 나타나는 것을 방해받게 될 것입니다. 진인은 물에 들어가도 젖지 않으며 불에 들어가도 타지 않고 운기(雲氣)를 타고 다니며 천지와 더불어 영원히 존재할 것입니다. 지금 황제께서 천하를 다스리시나 아직은 안정을 이루지 못하셨으니, 원하옵건대 황제께서 거처하는 궁궐을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게 하신다면 아마 불사(不死)의 약을 구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이에 진시황은 함양 부근 200리 안의 궁관(宮關) 207곳을 구름다리와 용도(用道)로 서로 연결시키고 휘장, 종고(鍾鼓), 미인들로 그곳을 채웠으며, 모두 등기된 부서에 따르게 하고 다른 곳으로 옮겨가지 못하게 하였으며, 자신이 행차하여 머무를 경우에는 그 거처를 말하는 자는 모두 사형에 처하였다. 이는 그가 얼마나 불로장생의 염원이 간절하였는지를 보여준다.

 

 

불로초를 찾아다닌 서복

 

 

 

 

2. 많은 유학자가 희생된 분서갱유(焚書坑儒)

    '분서(焚書)'는 책을 불사른다는 뜻이고, '갱유(坑儒)'는 유생을 구덩이에 산 채로 파묻는다는 뜻이다. 《사기》의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에 기록되어 전해지는 사건에서 비롯된 말로, 학문과 사상에 대한 탄압을 상징하는 의미로도 쓰인다.

 

《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기원전 213년 진시황은 박사(博士) 70명과 함께 함양궁(咸陽宮)에서 주연을 벌였다. 이때 제나라 출신인 순우월(淳于越)이 군현제(郡縣制)에 반대하며 은(殷)ㆍ주(周) 시대의 봉건제(封建制)로 돌아갈 것을 주장했다. 그러자 승상(丞相)인 이사(李斯)는 이를 비판하며, 황제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사사로운 학문으로 도당을 이루지 못하도록 엄격히 통제할 것을 주장했다.

 

그의 건의로 '협서율(挟書律)'이 제정되어 의약(醫藥)ㆍ복서(卜筮)ㆍ종수(種樹) 등의 분야를 제외한 시서(詩書)ㆍ제자백가(諸子百家)의 서적은 박사관(博士官)이 가지고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군수(郡守)와 군위(郡尉)가 수거해 모두 불사르게 했다. 명령을 받고 30일이 지나도 태우지 않으면 묵형(墨刑)과 성을 쌓는 일에 징발하는 형벌을 주게 했으며, 무리를 지어 시서를 논하면 처형한 뒤에 시신을 길거리에 버리는 기시(棄市)의 형벌을 주게 했다.

 

기원전 212년 진시황은 불사의 선약(仙藥)을 얻기 위해 후하게 대우하던 후생(侯生)과 노생(盧生)이라는 방술사(方術士)들이 자신을 비난하며 도망치자, 어사(御史)를 시켜 함양(咸陽)에 있는 유생들을 조사해 자신을 비판하는 자를 찾아내게 했다. 그리고 유생들이 서로 고발하여 금지를 어긴 460여 명을 찾아내자, 그들을 구덩이에 파묻어 모두 죽이고 그 사실을 세상에 널리 알렸다. 

 

 

분서갱유를 상징하는 그림

 

 

 

 

 

3. 무리한 대규모 토목공사 (만리장성, 아방궁, 황릉 등)

    만리장성 축조는 50만명을 동원하여 10년이나 걸린 대공사였다. 전국시대 진,조,연 국가들이 북쪽 흉노의 침입을 막기 위해 만들었던, 이미 존재해있던 북방장성(폭과 높이가 5~6m)을 서로 연결하고, 보수 확장하니 그 길이가 1만리나 되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인명피해와 국고의 탕진으로 백성들의 불만이 쌓여갔다.

 

설상가상으로 그는 아방궁황릉 건설에 70만을 동원하여 38년간이나 백성들을 노역에 봉사케 했다. 서안시 아방촌에 건립한 아방궁(B.C. 212년)은 현존 북경의 자금성 5배나 되는 거대한 궁으로, 동시에 1만명을 수용할 수 있었단다.

 

진나라 말 봉기 때 불질러 장장 3개월이나 불길이 치솟았다고 하니, 그 규모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결국 흉노토벌에 30만, 오령수비에 50만, 만리장성 축조에 50만, 아방궁 및 진시황릉 건축에 70만 등 무려 200만, 즉 그 당시 인구의 10%를 강제노역에 동원하여 집집마다 사상자가 생겨나고 생산은 떨어지고 백성들의 불만은 점점 더 팽대 해졌다.

 

중국 정부에서 복원한 아방궁의 모습

 

진시황릉의 병마용갱

 

 

 

 

진나라의 멸망 (유방과 항우의 등장)

'통일이후 15년만에 멸망한 진나라', '환관 조고에 놀아난 이세황자 호해'

    시황제가 죽고난 이후 진나라는 이세황제 호해(秦 二世皇帝 胡亥, 환관 조고에 시해당함), 진왕 자영을 끝으로 통일 이후 15년 만에 멸망한다. 중국사상 최초의 통일 왕조임과 동시에 가장 단명한 통일 왕조기도 하다. 시황제가 흉노를 막고자 만리장성의 축조에 들어갔고, 자기 무덤을 짓고, 도로를 만드는 등 거대하고 무리한 토목 공사를 일으켜 민심을 잃고 말았다.

 

진시황이 죽자 환관 조고와 승상 이사가 장남 부소(扶蘇, 환관 조고의 거짓 유서로인해 자결)를 제치고 호해를 황제로 옹립했는데, 조고는 황제의 권위를 등에 업고 온갖 악행을 벌였고 호해는 조고에게 정사를 맡기고 자신은 유흥에 빠지면서 대규모 토목공사를 벌여 민생을 도탄에 빠트렸다.

 

결국 기원전 209년 진승과 오광이 반란을 일으켜 장초라는 나라를 세웠다. 진승의 반란군은 파죽지세로 진나라 전역을 장악했고 진승의 부하들에 의해 육국이 부활했으며 심지어 주문이 이끄는 무리가 함곡관 앞까지 진군하기도 했다.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소부 장한이 나서 주문의 군대를 쳐부수고 장초를 짓밟은 뒤 되살아난 육국을 하나하나 제압했지만 그마저도 초나라의 장군 항우에 의해 막혔다.

 

장한의 군대는 기원전 207년 거록대전에서 항우에게 패배했고, 장한은 은허에서 항우에 항복했다. 한편 진군이 항우에 박살나고 있을 때 역시 초나라의 장수였던 유방이 이끄는 군대가 함양으로 들이닥치고 있었다. 그럼에도 아무것도 모르던 호해는 모반을 꾀한 조고에 의해 시해당했고, 조고는 인망이 두터운 자영을 옹립했지만 자영은 조고와 그 일족을 멸문시켜버렸다.

 

하지만 이미 대세를 거스를 순 없었고 자영은 기원전 206년 유방에 전국옥새를 바치며 항복했다. 유방은 자영의 항복을 받아주고 주위의 간언에도 불구하고 죽이지 않았으며, 진나라 사람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군대를 함양 밖으로 물리고 진나라의 가혹한 법을 대체할 약법삼장을 반포하여 민심을 다독였다.

 

그러나 뒤늦게 관중에 입성한 항우가 자영을 죽이고 이듬해에 수도를 불태워 진나라는 멸망했다. 이후 항우와 유방이 가장 큰 군웅으로 떠오르면서 결국 초한전쟁이 시작되었다.

 

 

진나라 역대 왕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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