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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역사 11] 전국시대(戰國時代)-진시황제의 등장, 한나라의 멸망, 조나라의 멸망, 간신 곽개에 의해 물러나는 조나라 명장 염파, 이목 장군, 연나라 태자 단, 형가의 진시황 암살 사건, 진시..

by 막장life 2024. 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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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역사-전국7웅(戰國七雄) 중 진나라(  )의 통일

 

전국시대 멸망순서(한->조->위->초->연->제나라)

 

진나라 통일 진 시황제( 秦始皇帝)의 등장

 

 

전국시대를 통일한 진 시황제

 

 

 

 

진 시황제(秦始皇帝, 기원전 259년 1월 ~ 기원전 210년 음력 6월 14일)는 전국 칠웅 진나라의 제31대 왕이자 제1대 황제로, 세계 최초의 황제이다. 성은 영(嬴), 씨는 조(趙)·진(秦), 이름은 정(政)이다. 사마천(司馬遷)은 진본기(秦本紀)에서 시황제(始皇帝)가 전쟁, 통일, 축조, 국정, 인사를 직접 처리하는 능력이 있었으며 토착 귀족 세력과 신하의 조언을 판단하는 시각이 뛰어난 왕(王)이었다고 평했다.

 

기원전 246년부터 기원전 210년까지 재위하는 동안 기원전 246년부터 기원전 241년까지 여불위가 섭정을 하였고 기원전 241년부터 기원전 210년 붕어할 때까지 친정을 하였다. 불로불사에 대한 열망이 컸으며, 대규모의 문화 탄압 사건인 분서갱유를 일으켜 수 양제와 더불어 중국 역사상 최대의 폭군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도량형을 통일하고 전국 시대 국가들의 장성을 이어 만리장성을 완성하였다. 분열된 중국을 통일하고 황제 제도와 군현제를 닦음으로써, 이후 2천년 중국 황조들의 기본틀을 만들었다. 

 

 

 

 

 

진나라의 6국 공격 순서도

 

 

진나라 통일의 첫 희생양, 한나라의 멸망

한나라(韓, 기원전 403년 ~ 기원전 230년)는 전국시대의 칠웅(七雄) 가운데 하나이다. 수도는 초기에는 양책, 후기에는 신정(新鄭, 지금 허난성 정저우시 신정시)이었다. 춘추오패의 하나인 진(晉)에서 분리된 나라이며, 위나라, 조나라와 더불어 삼진(三晉)이라고 일컬어진다.

 

앞서 다뤘던 것처럼 한나라는 진나라에 정국이라는 인물을 스파이도 보내고, 진시황이 눈여겨 보던 한비자도 넘겨주고, 영토일부를 헌납하는 등 살기위해 갖은 노력을 다하였지만 한비자와 이사의 논쟁에서 진시황은 이사의 편을 들어주었고 이사의 말대로 기원전 230년 한나라 수도 신정을 공격한다. 이에 수도를 포위당한 한왕 안은 항복을 했고, 이후 수도 신정에서 한나라 부흥운동이 일어났지만 한왕 안이 죽임을 당하면서 한나라는 멸망하게 된다.

 

 

 

간신 곽개에 놀아난 조나라의 멸망

조나라(趙, 기원전 408년 ~ 기원전 228년,기원전 222년)는 진나라(晉)에서 분리되어 나온 나라로서 전국시대의 전국칠웅 중 하나이다. 위나라, 한나라와 더불어 삼진(三晉)이라고 일컬어진다. 북쪽엔 연나라와 붙어있고 남쪽에는 황하가 흐르고 있다. 도읍인 한단(邯鄲)은 상공업의 대중심지였다. 호복(胡腹, 통소매와 바지)을 채용하였고 중국에 처음 기마 전술을 도입한 나라이기도 한다.

 

조나라에는 백전노장 염파(廉頗)가 혼자서 거침 없는 진나라를 상대로 고군분투했으나, 염파 역시 조나라 내부의 암투(간신 곽개의 모함)에 휘말려 초나라로 쫓겨나면서 조나라는 쇠퇴했다(이후 위나라에서 장군이 되었지만 특별한 성과없이 죽음을 맞이하였다). 특히 기원전 260년 장평대전에서 조괄 때문에 진나라에 완전히 패배하고 병사 40만 명이 몰살당한 후로는 골골거리는 신세가 되었다.

 

거기다 조 도양왕이 새로 들인 왕비에게 빠져 세자를 폐하고 새 왕비 소생의 어린 아이를 세자로 책봉했으며, 도양왕 사후 이 아이가 왕으로 즉위했다. 기원전 229년에 진나라가 왕전(王翦, 조/연/위/초 네 나라를 멸망시킨 대장군)을 보내 조나라를 공격하면서 이목, 사마상 등을 시켜 막게 했는데, 곽개(郭開)는 진나라로부터 돈을 받고는 이목(李牧, 흉노족 10만 군사를 막아내고 조나라 영토를 넓힘)과 사마상이 반란을 꾀하고 있다는 거짓말을 했다. 이로 인해 이목이 체포되어 죽고 사마상은 해임되어 조총, 안취 등이 그들을 대신하는 등의 사태가 일어났으며, 3달 후에 진나라가 조나라를 공격해 멸망시켰다.

 

 

진나라 명장 왕전, 조나라 백전노장 염파와 명장 이목

 

 

 

 

연나라 태자 단(丹)의 진시황제 암살 사건

기원전 233년, 연의 태자(太子) 단(丹)이 인질로 있던 진(秦)에서 도망쳐 왔다. 단은 진왕 정(政)과는 어렸을 때부터 친하게 지냈지만, 자란 뒤 정이 자신을 낮춰보는 것에 분노한 단은 연으로 도망쳐 복수를 꾀하게 된다. 그러나 진에 대한 분노는 단 자신의 개인적인 원한에 불과했고, 연보다 진의 국력이 훨씬 강한 정세상 자칫하면 연이 진에게 멸망당할 수도 있었다.

 

진왕 정에게 자객(刺客)을 보내기로 하고 의논하러 찾아온 단에게 전광은 형가(荊軻)를 추천했다. 자객으로서의 의뢰를 받은 형가는 조심스럽게 진왕에게 가까이 다가갈 방법을 찾았다. 그 방법이란 과거 진의 장군으로서 정이 제안한 군의 소수 정예화에 대하여 간언하다 정의 노여움을 사서 일족이 처형되고 연으로 망명해 온 번오기(樊於期)의 목을 바치는 것이었다.

 

 

진왕을 암살하려던 형가

 

 

 

 

형가는 직접 번오기를 찾아가 「상금이 걸려 있는 당신의 목을 대가로 내가 진왕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를 죽일 수 있다면, 분명 억울함도 수치도 벗겨질 수 있지 않겠습니까?」라며 설득했고, 번어기는 자신의 복수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목을 형가에게 내주었다.

 

이에 향가는 진의 수도 함양에 도착하여 영토 할양의 증표인 지도와 번어기의 목을 진왕에게 바치는 형식을 취하며 진무양과 함께 진의 왕궁으로 들어갔다. 진왕 정은 크게 기뻐하며 구빈(九賓)의 예로 형가 등을 맞아들이게 했다. 그런데 진무양이 진왕 정 앞에서 공포를 참지 못하고 그만 벌벌 떨기 시작했고, 지켜보던 군신들이 미심쩍어하기 시작했다.

 

 

진왕에 다가간 형가

 

 

 

형가는 직접 진왕 정에게 지도를 해석해주겠다며 가까이 접근했고, 두루마리로 된 지도를 풀자 두루마리 끝에서 미리 준비해 두었던 검이 나타났다. 형가는 비수를 잡고 진왕의 소매를 잡아 그를 찌르려 했지만, 아슬아슬하게 진왕의 옷소매만 끊어지고 진왕은 피할 수 있었다. 진왕은 다급히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빼려 했지만, 검이 너무 긴 탓에 칼집에 걸려 빠지지 않았다.

 

진의 법률에는 신하가 어전에 무기를 갖고 오는 것이 사형으로 다스려질 정도의 중죄였고, 병사들도 왕명 없이는 함부로 전상(殿上)에 오를 수 없었다. 이러한 와중에 형가는 비수를 가지고 진왕을 뒤쫓았고 진왕은 필사적으로 기둥을 이리저리 돌며 도망쳤지만, 진왕의 검은 빼려고 서두르면 서두를 수록 오히려 잘 빠지지 않았다. 군신들이 맨손으로라도 형가를 제압하려 하는 와중에, 시의(侍醫) 하무저(夏無且)가 갖고 있던 약상자를 형가에게 집어던졌다.

 

 

기둥을 놓고 대치한 형가와 진왕

 

 

 

형가가 놀란 사이 좌우에서 「왕이시여, 검을 등에 지고 뽑으소서!」라고 외쳤고, 진왕은 얼른 검을 등 쪽으로 돌려 짊어진 상태로 간신히 검을 빼어 형가에게 휘둘렀다. 형가가 가진 짧은 비수는 장검에 맞설 수 없었고, 형가는 진왕의 검에 다리를 베여 더 걷지 못한 채 마지막으로 진왕을 향해 비수를 집어 던지지만, 비수는 진왕을 비껴가서 기둥에 박혔다. 이를 놓치지 않고 진왕은 형가를 8번 찔러 죽였다.

 

화가 머리끝까지난 진왕은 기원전 226년, 연을 공격하였고. 이에 위기를 느낀 연나라 왕 희는 암살 음모의 주모자였던 태자 단의 목을 진나라에게 받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이에 연나라는 많은 국력을 소비하였고 쇠퇴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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