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역사-전국7웅(戰國七雄) 중 진나라( 秦 )의 통일
전국시대 (칠웅-진, 초, 연, 제, 한, 조, 위)
진나라 통일의 일등 공신 이사(李斯)
이사(李斯)는 초(楚)나라 상채(上蔡) 사람으로 하급 관리였다. 젊었을 때부터 야망에 불타는 사나이였는데, 관청의 오물을 먹는 쥐들은 변소를 전전하면서도 언제나 겁에 질려있는 반면 곡식을 먹는 넓은 창고의 쥐들은 사람이나 개를 겁내지 않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아 자신도 부유한 집의 쥐처럼 살기 위해 초나라를 떠났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이후 당대의 대강사 순자(荀子, 법가사상의 시조, 이사와 한비자의 스승)의 밑에 들어가 한비자(韓非子)와 함께 공부하고 이사가 진나라로 가려고 했다. 이때 스승인 순자가 이사에게 왜 조국이 아닌 진나라로 가냐고 묻자,"진나라는 모든 준비가 다 갖춰진 나라입니다."라며 진나라로 떠났다.
진나라에 도착하자 재능을 알아본 여불위의 추천으로 벼슬길에 오른다. 이후 여불위가 노애의 난으로 실각한 틈을 타 진왕 영정(진시황)의 환심을 사서 객경의 벼슬에 오르며 진나라의 기득권 세력과 맞서서 법가식 통치를 밀어 붙였다.
진나라는 이미 오랫동안 추진해왔던 원교근공 정책과 강력한 국력 및 회유, 뇌물, 암살, 이간질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외교로 전국의 주도권을 잡으려고 하였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한(韓)나라는 진나라의 국력을 소모시켜 시간을 벌고자 기술자인 정국(鄭國)을 진나라로 보내 진왕 정에게 척박한 진나라 땅에 수로를 건설하여 개간할 것을 건의하도록 하였다.
다만, 이는 진나라의 국력을 일시적으로 약하게 만들어 시간은 벌어줄 수 있어도 결국 개간이 끝나고 나면 진나라에 이로운 일이었다. 결국은 정국이 첩자라는 것이 발각되었지만, 공사를 완공하면 진나라는 부강해질 것이라고 설득해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로 인해 진나라에는 외국인을 모두 첩자라고 생각하게 되는 분위기가 생겼다.
이 사건을 빌미로 진나라 귀족들은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외국의 인재들을 모두 진나라에서 내보내야 한다는 '축객령(逐客令)'을 진왕 정에게 상소했고, 진왕 정도 이를 시행했다. 이때 쫓겨날 위기에 처한 초나라 출신의 이사는 진왕 정에게 '간축객서(諫逐客書)'를 써서 전했다. 이 편지는 진왕 정의 마음을 사로잡아 축객령은 폐지되었고, 진나라는 떠나간 천하의 모든 인재들을 불러들였다. 이후 이사는 진왕 정의 총애를 받게 되었다.
이사가 진왕 정의 측근이 되어 가장 먼저 공격해야 한다고 말한 나라는 한나라였는데 한나라는 진나라가 쳐들어 온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한나라의 왕족이자 진왕 정이 감명깊게 읽은 책의 저자인 한비자를 보내 진왕 정을 설득하도록 했다.
하지만 한비자는 이사의 생각과 달리 한나라를 공격하지 말고 조나라를 공격해야 하는 이유를 진왕 정에게 설명했는데,한비자는 원래 말더듬이라 달변가는 아니었지만 논리 정연한 주장에 진왕 정은 감탄했다. 문제는, 한비자는 진나라 같은 대국이 요가(姚賈)를 이용하여 뇌물로 타국의 관리를 매수하는 건 법가 사상을 기초로 하는 진나라에겐 맞지 않다고 요가를 비난한 것이었다.
이를 알게 된 이사와 요가는 진왕 정에게 한비자는 한나라의 왕족 출신이라 진나라에 대한 충성심이 조금도 없고 한비자가 이야기한 계책은 전부 한나라를 위한 계책이라 모함하여 한비자를 감옥에 가두고 독살시켜 버렸다.
진나라가 6국을 멸망시키고 천하를 통일한 후에 진왕 영정은 시황제라 선포하였다. 이사는 시황제의 명으로 각종 개혁 정책에 참여하여 주도하였다. 이렇게 시황제를 위한 책략을 많이 내고, 중앙집권적인 개혁 정책을 추진시켜 준 덕분에 말년에는 그 스스로가 진나라의 최대 기득권자가 되었고, 승상의 자리에 올랐다.
이사는 조정에서 지방관아로 직접 관리들을 파견하여 중앙에서 지방관들을 통제하도록 하고, 지방관의 근무 태도나 비위행위를 수시로 감찰하는 관리들의 파견을 건의하였다. 또한 왕의 형제나 친속에게는 친왕(親王)과 같은 이름뿐인 작위를 부여할 것도 주장하였다. 또, 정치에 쓸데없이 비판만하는 학자들의 저서를 모아 분서를 실시하도록 진언했다. 이는 후일 진시황의 분서갱유에 대한 정당화의 근거로 제시되었는데, 이때문에 그는 선비들을 죽음으로 몰고가게 했다하여 사후 다른 유학자들로부터 심한 비판을 받게 된다.
기원전 210년 가을 7월에, 시황제가 순행 도중에 사망하여, 이사는 환관 조고(趙高)와 함께 유언장을 위조하고, 시황제의 막내 아들 호해를 진 이세황제(二世皇帝)로 즉위시키고, 태자 부소를 자결하게 했다. 시황제 사후 기반이 흔들린 진나라는, 다음 해에 진승, 오광의 난을 비롯한 반란이 연이어 발생하여, 정국혼란이 가중되었으나 이세 황제는 국사를 멀리하여, 궁궐 밖의 상황을 모르는 상황이었다.
이에 이사는 이 난국을 어떻게든 막아보려 간언하였지만, 이사를 시기한 조고는 이를 불충으로 몰아 황제 호해를 분노케 한다.기원전 208년 이사는 우승상 곽거질(霍去疾), 장군 풍겁(馮劫)과 함께 아방궁의 축조를 멈추도록 이세 황제에게 진언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곽거질과 풍겁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사는 재차 황제에게 간하였지만, 오히려 이세 황제의 분노를 얻게 되고 설상가상으로 조고의 모략으로 집요한 문초를 받았으며 고문에 견디지 못한 이사는 조고가 날조하여 올린 죄(이사의 장남이자 삼천군 태수였던 이유가 반란자 진승의 장초 군대가 지나갈 때 막지 않았고, 이사와 진승이 서로 내통했다는 혐의)를 인정하였다.
호해의 명령으로 극형을 선고받아 함양의 시장에서 요참형에 처해진다. 이사 뿐만 아니라 당시의 반역자 처리규정에 따라 이사의 가족들과 일가 친척(삼족) 역시 끌려나와 모두 참형을 당해서 대가 끊기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