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기타

[중국역사 8] 전국시대(戰國時代)-통일의 기틀을 다진 명군 진(秦) 소양왕(昭壤王), 전국시대 최대의 전쟁 장평대전(長平大戰), 40만 포로를 생매장시킨 진나라 명장 백기, 진시황의 통일과정 3

by 막장life 2023. 12. 27.
반응형

중국 역사-전국7웅(戰國七雄) 중 진나라(  )의 통일

 

전국시대 (칠웅-진, 초, 연, 제, 한, 조, 위)

진(秦) 소양왕(昭壤王)

 

1. 통일의 기틀을 다진 명군 진(秦) 소양왕(昭壤王)

 

진나라의 제29대 군주이자, 제3대 왕. 휘는 직(稷) 혹은 측(側). 약칭 시호로는 '진 소왕'(秦 昭王)으로 부르기도 한다. 효공과 혜문왕에 이어 진시황의 전국시대 통일의 기틀을 다진 명군이다. 혜문왕의 팔자인 선태후에게서 서자로 태어났다. 기원전 307년 무왕이 갑작스럽게 죽자 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진나라에의 신하들이 반대하는 가운데, 위염(魏冉, 소양왕의 외삼촌)등 신하들의 지원으로 이복형 무왕의 뒤를 이어 왕으로 즉위하였다. 무왕에서 소양왕으로의 왕위 계승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따라서 소양왕은 재위 초기에 왕실 내부의 반발을 억누르고 왕권을 확립하는 데 힘을 기울여야 했다.

 

 

 

2. 전국시대 최대의 전쟁 장평대전(長平大戰)_진(秦)과 조(趙)나라의 대결

 

가. 장평대전 배경

 

진 소양왕(昭襄王)이 범수(范睢, 군권강화를 위해 등용)를 승상으로 앉혔다. 범수가 제창한 원교근공책(遠交近攻策), 즉 가까운 곳을 공격하고 먼 곳과는 화친을 맺는 전략을 국시로 삼아 먼곳에 있는 제나라 공략을 보류하고 인접한 한나라와 위나라를 주적으로 설정했다.

 

기원전 265년 진은 명장 백기(白起, 진나라 명장이자 위염의 충신)를 보내 한나라를 공략했고, 한나라는 영토가 남북으로 두 토막나 북쪽 상당(上黨) 지방이 고립되었다. 그러자 한나라 상당 태수는 진에게 땅을 뺏기느니 조(趙)나라에게 주는게 낫다고 여겨 덜컥 조나라에 항복해버렸고, 조나라 효성왕(孝成王)은 이를 좋다고 덮석 받았다. 이에 진나라는 화가 치밀었고 이로써 진(秦)과 조(趙) 양국의 운명을 건 전국시대 최대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좌-원교근공책을 주장한 범수(范睢), 우-진나라 명장 백기(白起)

 

 

 

나. 장평대전 진행

 

기원전 262년 진나라의 재상인 범수(范睢)의 명을 받들어 장수 왕흘(王齕)은 진군을 이끌고 상당(上黨)을 접수하기 위해 진격했다. 조나라 군대는 빠르게 남하하여 상당의 군민들을 접수함과 동시에 진나라의 만행을 천하에 공표하며 다른 5국의 지원을 기대했지만 범수를 필두로 한 진나라의 원교근공 전략에 조나라는 고립되어 다른 5국의 지원을 받기 어려웠다.

 

장평대전(長平大戰) 형세도

 

 

그 후 상당의 군민들을 추격하던 왕흘이 장평(長平)에 도착했고, 연이어 도착한 조나라의 명장 염파(廉頗)가 이끄는 조나라의 군대와 전투가 시작된다. 진나라 군대를 상대로 수 차례의 전투를 치른 조나라군은 병력에 손실을 입었다.

 

전초전을 치른 이후, 강력한 진군을 정면승부로 압도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염파는 장평에 강력한 방어진을 건설하고 지구전에 들어갔다. 이에 진군이 공세를 퍼부었지만 염파는 번번히 진의 공격을 막아내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보급문제로 인하여 진의 대군이 본국으로 돌아가기를 노리고 있었다.

 

그 사이 조나라에서는 전쟁을 끝내기 위해 진나라에게 화해를 청하는 한편, 위나라, 그리고 초나라와 연합하여 진나라를 공격하려고 했다. 그러나 사절단이 진나라의 첩자들에게 발각되었고, 진나라는 위나라를 협박해 위나라와 초나라의 연합계획을 중단시켰다.

 

시간이 흐를수록 원활하게 병력을 보충하고 충분한 보급을 받는 조나라에 비해 진나라 군대는 왕흘의 지휘 아래에서 치러진 수차례 공세의 실패로 인하여 병력소모가 막심해 전투력이 낮아져 있었다. 장평까지 늘어진 보급선이 한나라나 위나라에 인접해있어 다른 5국에 공격받기 쉬운데다가, 초나라까지 이어진 넓은 전선은 진나라에 병력 집중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범수의 이간질에 효성왕에게 해임당한 조나라 명장 염파

 

가만히 있다가는 진나라의 패배가 확실한 상황이었다. 이에 범수는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승률이 낮은 도박수를 던졌다. 조나라에 첩자를 보내 지구전을 펼치는 염파를 비방하는 소문을 내어 조나라 효성왕과 조나라 명장 염파 사이를 이간질하고 조나라로 하여금 장평의 굳건한 진지에서 나오게 하려고 했다. 동시에 몰래 장평 주둔 진나라군의 총사령관을 자신의 정적이지만 당시 진나라 최고의 명장이라는 평가를 받던 백기로 교체하고, 왕흘을 부사령관으로 하여 이를 발설하는 자는 참수에 처하게 하도록 했다.

 

염파의 방어전으로 전황이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지만, 조 효성왕은 내심 염파에게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해를 넘기는 총력전은 조나라의 재정에 엄청난 부담이 되었고, 일방적으로 방어만 하며 진군과 싸워 물리치지 못하는 염파가 못마땅했다.

 

이를 파악한 범수는 조나라 정계에 염파가 진나라에 투항하려 한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이후 진나라 첩자가 흘린 유언비어가 조나라에 퍼지자 효성왕은 이를 핑계로 염파를 해임하고 단기결전을 주장했으며 뛰어난 젊은 인재라는 평을 듣던 조괄(趙括)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총사령관을 실전 경험이 전무한 조괄로 교체하는 것에 대해 많은 이들의 반대가 있었다.

 

하지만 이를 무시하고 효성왕은 조나라의 동원 가능한 장정을 모두 동원하여 조괄에게 25만의 군사를 주고 장평으로 향하게 했다. 문제는 장평이 장기간 빗물에 의해 침식이 일어난 황토고원지대로 협로와 골짜기들이 곳곳에 산재해 있어 매복과 포위가 쉬운 지형이었다는 것이었다.

 

조군의 공격을 예상한 백기는 이를 이용해 미리 견고한 방어 시설들로 이루어진 U자형의 포위망을 건설한 후 조군을 끌어들일 계획을 세웠다. 조괄은 새로 징집한 25만 군사와 장평에서 대치 중인 20만 군사를 합쳐 진군에 공격을 시작했다. 이에 백기는 조군을 상대로 몇번의 전투에서 연이어 패배하는 모습을 보이며 군사를 후퇴시켰다.

 

조괄의 군대를 협곡으로 유인하여 공격하는 진나라 군대

 

승리감에 취한 조괄은 계속해서 병력을 장평의 협곡안으로 진군시키며 진군을 추격하였고, 진군은 조군의 진격에 계속 후퇴하며 포위망의 종심까지 조군을 끌어들였고, 포위망의 양 날개에 매복군을 남겨 포위망을 형성하였다. 조군의 공격이 진군이 계획한 포위망의 끝단까지 다다랐을 때 전열을 정비한 조군은 진군을 맹렬히 공격했다.

 

결국 장평이라는 요새에 스스로 갇힌 조군은 진군의 포위망에 갇혀 파멸을 맞이했다. 포위된 지 46일이 지나 식량과 물이 고갈되었다. 속수무책이 된 조괄은 포위망을 뚫어보기 위해 최후의 공격을 했지만 효과가 없었으며, 결국 화살에 맞아 장평에서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다. 장평대전의 최후

두로산 백기대에 있는 해골사원

 

 

조나라의 40만 포로를 생매장시킨 진나라 명장 백기

한꺼번에 40만이라는 엄청난 포로를 받게 되었지만 많은 포로를 먹일 군량이 없었고, 전에 상당(上黨)의 백성들이 진의 백성이 되지 않은 것처럼 조의 군사들도 난을 일으킬 것이라 생각한 백기는 결국 끔찍한 선택을 했다. 백기는 조나라 군사들이 조를 나누어 구덩이를 파게 한 후, 그곳에 군사들을 묻어버렸으며, 전투 후에 취한 조나라 군사들의 수급을 모아 영루(營壘)에 쌓게 하였다. 백기는 이 산을 두로산(頭顱山)이라 부르고, 이 산 꼭대기에 지은 누각을 백기대(白起臺)라 불렀다.

 

세계 전사상 가장 참혹한 전쟁이었다. 이 전쟁에 대한 이야기가 과장이 아니라는 사실이 최근의 발굴에서도 밝혀졌다. 어마어마한 집단유골이 최근 발견되어 다시 한번 세상을 놀라게 한 것이다.

 

 

1995년 10월 20일 산서성 진청시 교외 영록촌에서 실제 장평전투의 희생자로 추정되는 수백구의 유골들이 발굴됨

 

 

 

 

 

 

 

 

반응형